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그나이우스 폼페이우스 마그누스 (문단 편집) === 전성기 === 기원전 70년 집정관에 선출된 폼페이우스와 크라수스는 사실상 사문화되어 있었던 [[호르텐시우스 법]]을 부활하는데 이는 원로원의 뜻에 반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폼페이우스는 휘하 군단병들의 몰표로 당선된 [[호민관]] [[아울루스 가비니우스]]를 앞잡이로 내세워 각종 특혜를 법으로 통과시켰다. 이 시기 지중해엔 해적이 날뛰고 있었다. 이 당시 로마의 통제력이 약해졌고[* 지루한 내전을 벌인데다가 정국 불안정이 뒤따랐기 때문이다.] 또한 다른 동방의 국가들은 로마에게 얻어터진 이후로 힘이 없었다. 따라서 해적들이 판을 치면서 로마에 수입되는 곡물들마저 위협받자 이를 해결하길 원했던 것이었다. 이것을 해결하기 위해 기원전 67년 호민관 가비니우스가 제안한 법률이 걸작이었다. 폼페이우스에게 모든 지중해와 지중해 해안선의 50마일 이내를 관할하는 권한([[임페리움]])을 주고 임기를 3년이나 주자고 한 것이었다. 로마는 여지껏 군사지휘권을 한 사람에게 이렇게까지 준 적이 없었다. 모든 장군들은 그들이 관할한 영역이 있었으나 폼페이우스는 제한없이 지중해 전체를 관리하게 된 것이었다. 이것은 로마의 생사여탈권을 폼페이우스에게 주는 것이나 다름없었는데, 그 이유는 폼페이우스가 가지게 될 군사지휘권의 규모가 다른 장군들을 압도했고, 또한 모든 선단을 장악하게 되므로 다른 장군들의 해양 보급 라인도 폼페이우스가 갖게 되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원로원은 이것을 반대했지만 해적 문제가 심각했고, 폼페이우스의 인기가 워낙 높았기 때문에 이 법안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폼페이우스는 3년의 임기를 가진 해적 소탕을 단 '''3개월''' 만에 일소하는 포스를 보였다. 그는 지중해 전체를 13개의 구획으로 분할하고, 이를 휘하 장교들에게 각각 맡겨 해적들을 한 곳으로 몰아붙였다. 그 뒤 킬리키아에 집결한 해적들을 한 번에 일소함으로써 지중해 전체를 깨끗이 청소했다. 이때 해적 소탕 방법의 전술은 일단 기본적으로 직접적인 소탕을 피하고, 항구를 점령한 후 물과 식량 보급을 끊고, 이 짓을 반복해 해적의 움직임을 쉽게 노출시켜 3개월이라는 짧은 시간 내에 제압에 성공한 것이다. 3년의 임기 중 폼페이우스가 사용한 임기는 1년밖에 안 되었으므로 아직 2년이 남아 있었다. 이때 호민관 가이우스 마닐리우스는 폼페이우스에게 이 남은 임기를 사용하여 폰토스의 왕 [[미트리다테스 6세]]를 제압하게 하자고 제안했고 이는 민중의 환영을 받았다. 미트리다테스 6세는 술라와 싸운 바로 그 미트리다테스 로 원로원의 막장 행각에 로마가 붕괴해가는 걸 눈치채고 있었기에 치밀한 계획으로 로마를 괴롭히고 있었다. 그는 아르메니아를 포섭하고 중동권의 승인 반 묵인 반을 등에 업으며 게릴라식 장기전과 소모전으로 로마를 동쪽에서 무너트리고 있었던 강자였다. 이때 동방엔 이미 [[루쿨루스]]가 파견되어 미트리다테스 6세를 상대하고 있었다. 루쿨루스는 기원전 74년에 부임하여 무려 7년에 걸쳐 미트리다테스 6세와 전쟁을 벌였다.([[제3차 미트리다테스 전쟁]]) 그는 휘하 5개 군단을 활용하여 미트리다테스 6세의 침략을 격파하고 도망가는 그를 뒤쫒아 폰토스를 공격했다.(기원전 71년) 미트리다테스 6세는 아르메니아로 도망가서 [[티그라네스 2세]]와 동맹을 맺은 뒤 함께 루쿨루스와 싸웠는데, 루쿨루스는 상당한 숫적 열세에도 불구하고, 뛰어난 전술로 연합군을 격파하는 위업을 달성했다. 하지만 뒤이어 두 왕을 쫒아 아르메니아의 영토로 진입한 루쿨루스에게 로마 군단병이 반란을 일으켰다. 이들은 전리품의 배분 문제로 불만을 품었으며 또한 오랜 전쟁으로 지쳤기 때문에 그리한 것이었다. 루쿨루스는 당시 기축통화인 '''은화'''를 병사들에게 충분히 나눠줬다. 하지만 장기적인 동방 통치를 위해 그리스인과 척을 지면 안 된다고 생각해서 그리스계 도시를 약탈하는 걸 허용하지 않았다가 부하들의 불만을 사게 되었다. 아르메니아의 수도 티그라노케르타의 약탈은 허용했지만 [[푸블리우스 클로디우스 풀케르]]가 병사들을 선동했다. 안팎으로 파국을 맞은 루쿨루스는 군사 반란을 전혀 통제하지 못했고 미트리다테스 6세는 이때 총반격을 감행해서 그동안 잃은 걸 거의 다 복구한 상황이었다. 물론 겉으로만 그렇고 전성기 폰토스의 군사력은 술라와 루쿨루스가 박살을 내놔서 복구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아무튼 병사들이 싸우길 거부하자 로마군에 내분이 일어났다는 정보를 들은 미트리다테스 6세는 소수의 정예군을 이끌고 폰토스 영토로 슬그머니 들어가 반란을 선동했다. 이런 소동 때문에 루쿨루스는 퇴각했고, 이러는 동안 미트리다테스가 폰토스 내의 젤라라는 도시에 주둔하고 있었던 로마군 본부를 공격해 점령하게 되었다. 이 때문에 루쿨루스는 폰토스로도 돌아갈 수 없게 되는 바람에 자신의 속주로 되돌아갔다. 7년에 걸친 미트리다테스 전쟁이 모두 무위로 돌아간 것이었다. 폼페이우스는 5년 임기를 부여받았고, 로마령 아시아 속주에 부임하여 루쿨루스로부터 지휘권을 양도받았다. 이때 루쿨루스와 폼페이우스는 말다툼을 했는데 루쿨루스는 지휘권을 양도하기 전에 폼페이우스를 사냥개가 쓰러뜨린 사냥감을 낚아채는 새라며 비난했고, 폼페이우스는 루쿨루스의 탐욕을 비판했다. 사실 폼페이우스의 공적을 보면 유난히 전임자가 상당수 해놓은 걸 마무리만 지은 게 꽤 있는데, 폼페이우스의 스페인 정복도 그의 전임자에 의해 많은 부분이 진척된 것을 폼페이우스가 마무리지은 것이었으며[* 특히 스페인 반란군의 지휘자 세르토리우스는 탁월한 게릴라전 지도자였다. 폼페이우스도 혼자 덤볐을 때는 세르토리우스에게 탈탈 털리기도 했다가 메텔루스 피우스의 지원을 받은 뒤에야 세르토리우스를 물리쳤다. 하지만 세르토리우스는 여전히 로마군을 괴롭혔으며 세르토리우스가 암살당한 뒤에야 스페인의 안정이 가능해졌다.] 스파르타쿠스 반란의 잔당들이 알프스를 넘어 북상하려는 것을 폼페이우스가 처리한 뒤에 이것을 대대적으로 선전했다. 그리고 루쿨루스가 거의 다 해놓은 동방 원정을 폼페이우스는 단지 마무리지으면 되는 것 등을 포함하면 이러한 비난을 듣는 것은 어쩔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하여 마무리를 짓는 것 역시 중대한 책무이며 결코 쉽지 않은 일이므로 폼페이우스의 업적이 작다고 평가절하할 수는 없는 일이다. 하지만 이런 일이 이렇게 자꾸 반복되면 이런 말을 들어도 할 말이 없으며 실제로 [[영어 위키백과]]의 [[https://en.wikipedia.org/wiki/Pompey|문서]]에서도 폼페이우스는 다른 장군들의 전공을 훔친 것으로 명성을 쌓았다고 했다(...).[* 'While being a superb commander, Pompey also earned a reputation for stealing other generals' victories.'] 지휘권을 양도받은 후 폼페이우스는 본격적으로 미트리다테스 6세를 토벌하기 시작했다. 루쿨루스가 철수하긴 했으나 그가 폰토스와 아르메니아 두 왕국의 군대와 재산을 거의 전부 소멸시켜 놨기 때문에 이는 꽤나 수월한 작업이었다. 또한 폼페이우스는 루쿨루스보다 두 배나 많은 군단병을 데리고 왔기 때문에 루쿨루스보다 더 편안하게 진압할 수 있었다. 그는 파르티아 왕에게 사신을 보내 아르메니아를 돕지 말라고 했고 이 약속을 받아낸다. 이 때문에 아르메니아도 폼페이우스쪽에 붙기로 결심하고 미트리다테스 6세와의 관계를 청산했다. 이렇게 외교적인 문제를 마무리지은 뒤 폼페이우스는 폰토스 왕국으로 진입했고 미트리다테스 6세는 이를 저지하려고 북서쪽의 국경으로 나왔으나 금세 격파당하여 폰토스를 버리고 달아났다. 폼페이우스는 루쿨루스와 달리 이를 추격하지 않고 놔둔 채 폰토스 정리 작업에 착수했다. 미트리다테스 6세는 자신이 모아놓은 재산을 모두 털어 군대를 다시 편성해 폰토스에 진입하려고 했다. 그러나 이미 대세가 기울었다고 생각한 부하들이 반란을 일으켰고 그는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폼페이우스는 미트리다테스 6세를 진압하라는 임무만 받았을 뿐이었으나 그는 시리아까지 진격하여 팔레스티나의 [[하스몬 왕조]]와 [[셀레우코스 왕조]]를 합병해버렸다. 이는 월권행위였으나 폼페이우스는 이를 두 왕조가 너무 약하기 때문에 로마가 안 먹으면 파르티아가 먹을 것이라며 정당화했다. 하지만 더 큰 동기는 폼페이우스가 그의 군사적 성취를 더 돋보이게 하고자 했기 때문이었다. 그 결과 4년 뒤인 기원전 62년, 폼페이우스에 의해 미트리다테스 6세의 폰토스, 셀레우코스 왕가의 시리아, 하스몬 왕가의 [[팔레스타인]]이 로마의 속주가 되었다. 폼페이우스가 그동안 정복한 국가의 수는 저 두 왕조외에 자잘한 왕조까지 합쳐 14개나 되었다. 이런 영토의 확장으로 인해 폼페이우스는 로마에게 엄청난 수입을 안겨주었는데 이로써 로마의 1년 예산이었던 2,000만 [[세스테르티우스]]가 3,400만 세스테르티우스로 증가하게 되었다. 이때 로마에서는 집정관이었던 [[마르쿠스 툴리우스 키케로]]가 [[루키우스 세르기우스 카틸리나|카틸리나]] 반란을 진압했다. 이런 소동을 처리한 원로원은 폼페이우스가 임기를 마치고 그의 군대와 함께 귀국하고 있다는 소문을 들었다. 이에 원로원과 시민들은 촉각을 곤두세웠는데 그 이유는 폼페이우스가 어떻게 나오느냐에 따라 원로원과 로마의 운명이 달라지기 때문이었다. 폼페이우스는 로마 시민들의 절대적인 지지를 받았으며 그와 휘하 군대의 규모 및 그들이 보유한 동방의 전리품들을 포함하면 로마는 그들에게 맞설 능력이 없었다. 폼페이우스가 이때 마음먹으면 로마를 점령한 뒤 제2의 술라가 되어 최고 권력자로 등극할 수 있었다. 그러나 브룬디시움에 상륙한 폼페이우스는 모두를 놀라게 했는데, 그는 자신의 군단을 바로 해산해 버린 것이었다. 이것은 폼페이우스가 정치적인 야심이 그다지 크지 않았거나 혹은 원로원이 로마를 다스려야 한다는 술라의 신념을 추종했기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폼페이우스는 어떠한 정치적인 움직임조차 시도하지 않았고, 단지 원로원이 자발적으로 자신이 처리한 동방의 일을 승인해주고 또한 군단병에게 토지를 배분해 주길 원했다. 하지만 원로원은 폼페이우스를 시기했고 또한 그가 군대를 해산했으므로 그에게 겁먹지도 않았다. 폼페이우스의 요청이 지극히 합리적이었고 또한 그가 정부를 뒤엎지 않는 것만으로도 원로원은 큰 빚을 진 것이나 다름없었음에도 불구하고, 부패하고 근시안적인 원로원은 단지 인기가 높은 폼페이우스의 체면을 구기는 것에 집중했다. 이로써 폼페이우스의 요청은 무려 3년간이나 결정되지 않고 시간을 끌게 되었다. 폼페이우스가 거느렸던 대규모의 군단병들은 모두 실업자 신세였으며, 폼페이우스는 자신의 저택에 틀어박혀 나오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폼페이우스가 개편한 동방은 방치되고 있었다. 이런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소 카토]]를 위시한 로마 원로원은 이것을 개의치 않았다. 결국 이러한 원로원의 행동은 결과적으로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출현을 낳아 이들을 자폭하게 만들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